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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 70배' 세탁소, 중요한 가치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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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5-1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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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종 중소기업 노동자들
금속·화학물 붇은 옷 세탁 불편
민관 뜻 모아 전용 세탁소 설치
경남서 처음 시작해 전국 확산

창원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
자활 접목 사회적 일자리 창출
저렴한 비용 편리한 이용 인기
경남은행 도움 확장·이전 계획

노력에 따른 성과급, 유연 근무제, 자유로운 연차 사용, 동호회 활동, 자녀 학자금…. 오늘날 기업이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대표적인 복지 제도이다. 기업 처지에서는 인재를 붙잡아둘 수단이기도 하고, 노동자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기업 규모에 따라 복리후생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업종상 꼭 필요한 복지도 미처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서로 다른 사회적 주체들의 연대로 '복지의 사각지대'를 사회화하는 일도 있다. 경남에서 처음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 나간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이야기다.

◇경남에서 시작된 연대, 전국으로 뻗어 = 노동자 대부분은 퇴근하자마자 하루 노동 흔적이 묻어난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는다. 그날의 고충을 땀과 함께 씻어내고, 다음날에는 새 옷을 입는다. 그런데 금속·기계·화학·석유 등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모르는 고충이 있다. 작업 공정에서 땀뿐 아니라 각종 금속가루·화학물질 등이 작업복에 묻는 것이다. 대기업은 자체 복지로 사내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가족들 걱정에 집 세탁기는 못 쓰고 민간 세탁소에 맡길 수밖에 없는데, 비쌀 뿐만 아니라 거절당하는 사례도 있다.

이러한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대안 복지' 모델이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다. 각기 다른 사회적 주체들이 열악한 노동자들의 복지를 개선한다는 목적 하나로 연대해, 작업복을 저렴하게 씻어주는 서비스를 창조해낸 것이다.

경남이 첫 사례였다. 2019년 김해에서 전국 처음으로 작업복 세탁소가 만들어졌다. 경남도·김해시는 설치비와 운영비 3억 9000만 원을 댔고,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부는 2016년부터 모은 사회연대기금 중 2670만 원을 들여 세탁물 수거·배달용 1t 승합차를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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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창원시 동읍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에서 노동자들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같은 해 세운 창원 세탁소는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설치비를 지원하고 창원시가 운영비를 댔다. 이 기금은 2017년 정부가 공무원 성과연봉제 강제도입 정책을 폐지하면서 양대노총 공공부문 공동대책위와 합의해 만든 사회 연대기금이다. 2020년 거제에 들어선 세탁소는 LG전자가 세탁기를, BNK경남은행과 NH농협은행이 차량을 지원했다. 이어 2021년 진주 세탁소 설립 때는 진주시와 한국남동발전이 힘을 보탰으며, 의령군에는 작은 규모지만 코인 세탁소가 들어섰다.

경남에서 시작된 연대의 형태는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현재 광주·경북·울산·경기 등 대규모 산업단지가 있는 지역에서는 대부분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를 운영 중이다.

◇ 사회적 의미와 지속가능성, 두 마리 토끼 잡아 = 지난 11일 창원시 동읍에 있는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을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초록 바닥의 공장 구석에는 커다란 세탁기·건조기가 각각 3대, 중앙에는 작업대가 놓였다. 자활노동자 6명이 작업대에서 부지런히 작업복을 정리 중이었다.

작업은 오전에 고객사를 돌며 세탁물을 수거·배달한 뒤, 오후에 본격적인 세탁 작업에 들어가는 순서다. 회사별 서류에는 옷 한 벌당 번호가 부여돼 있고, 세탁희망 유무, 특이사항 등을 적어놓았다. 특이사항에 적힌 해진 곳이나 지퍼가 떨어진 곳을 깁는 등 간단한 수선까지 해 준다. 만약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으면 몇 번의 손빨래 과정을 거쳐서라도 깨끗이 씻어낸다.

지난 11일 창원시 동읍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에서 최고참 노동자 황 영미(52) 반장과 김아름 창원지역자활센터 팀장이 활짝 웃고 있다.  /이창우 기자
지난 11일 창원시 동읍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에서 최고참 노동자 황 영미(52) 반장과 김아름 창원지역자활센터 팀장이 활짝 웃고 있다. /이창우 기자

이날 만난 황영미(52) 창원지역자활센터 클린업사업단장은 세탁소가 생겼을 때부터 일했던 최고참 노동자다. 황 단장은 "허리가 안 좋다 보니 다른 직장을 구하고 싶어도 피해를 줄까 봐 선뜻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이 일은 보람이 있다"라며 "일이 없었을 때는 '앉아서 놀면 뭐해'라는 생각으로 각 공장 경비실에 가서 안내 책자를 돌리기도 하고 문전박대도 당했다"라고 말했다.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가 의미 있는 이유는 각기 다른 주체가 연대한 결과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모델은 자활 근로 체계를 접목해 두 가지 효용을 얻었다. 사회적 약자가 누릴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는 동시에, 저렴한 세탁비를 유지해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은 12명의 자활근로자가 조를 짜서 일하고, 세탁비는 상·하의 1벌에 500원(동복은 1000원)에 불과하다.

자활이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있는 8대 급여 중 하나다. 생계·의료·주거급여 등 복지와 다른 점은 수혜자가 스스로의 노동으로 다시 사회에 뿌리내리게끔 돕는다는 점이다. 복지 대상 저소득층이나 차상위계층 중 근로능력·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활 근로에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이들 노동의 대가는 정부가 복지 예산으로 지급한다. 세탁비를 한 벌에 500원으로 책정해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전국에 확산된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는 대부분 지역자활센터가 운영하고 있다.

◇경남은행 연대로 더 많은 노동자 혜택 예정 = 세탁소 문을 연 지 4년여, 매출은 첫해 70여 만 원에서 5000만 원 이상으로 성장했다. 고객사도 50여 곳으로 늘었다. 발로 뛰어가며 홍보한 고객사들로부터 입소문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민권 HSG중공업 노동자는 "작업 현장에서 절단·가공을 반복하다 보면 작업복 오염이 심해 이삼일에 한 번씩은 빨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빨거나 민간 세탁소를 이용했었지만, 1벌에 7000원 정도 들어서 돈이 많이 들었다"라며 "한번 사용해보니 저렴하게 빨아주고 배달까지 해주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고, 아내도 세탁·다림질하는 수고를 덜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5명 정도 이용하다가 지금은 40명까지 늘어났는데 주변 회사들도 이용하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난 11일 창원시 동읍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에서 노동자가 세탁물 분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지난 11일 창원시 동읍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이야기가 있는 빨래방'에서 노동자가 세탁물 분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사업이 번창하는 일은 좋지만, 나름의 고민도 있었다. 세탁소가 동읍에 있어 창원국가산업단지 외 마산자유무역지역, 진해 마천주물공단 등 거리가 먼 곳은 수거와 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루 소화 가능한 세탁량이 현재 시설로는 1000벌에 불과한 문제도 있었다.

마침 손을 내민 곳이 BNK경남은행이었다. 지난달 창원시 노동자 작업복 공동세탁소에 5억 원을 후원하기로 결정했다. 거제시 세탁소에 세탁물 수거차량을 기증한 데 이어 또 한 번의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 후원으로 창원지역자활센터는 창원시와 함께 세탁소를 국가산업단지 내로 확장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동읍 세탁소 공장터 임대기간이 끝나는 8월까지 팔룡동이나 성주동 등 적당한 장소를 찾을 예정이다. 이전 이후에는 하루 세탁물 소화량도 1000벌에서 2000벌 수준으로 늘어나고, 마산·진해 중소기업 노동자들도 이용이 가능해진다.

김아름 창원지역자활센터 팀장은 "이런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업체들도 있고, 세탁물 계약을 하더라도 직원 급여에서 차감하는 경우가 많다"라며 "각종 사회적 주체들이 힘을 모아서 만든 선순환 체계라는 점을 생각해, 이용 기업들도 세탁비를 운영비에서 차감해주는 방향으로 연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창우 기자